1부 : 삶의 끝에서 만난 흡선 (이ΟΟ : 여, 48세)
입춘첩은 못할망정 취재와 글쓰기 시작은 해야겠다 싶어 나선 길이었다. 2월 8일... 경자년 새해가 시작 된지 한 달이 지나고도 8일이 넘어서야 용기를 내어 첫 취재에 나섰다. 취재를 마치고 돌아와 글로 써봐야겠다는 압박감에 도리어 한 줄도 못 쓰고 또 열흘을 보냈다. 갑자기 내린 폭설로 보이는 지리산 기슭마다 희부연 눈이 쌓였고, 발길마다 깊은 자욱이 찍히는 길을 걸어 사무실에 앉아 묶은 숙제를 하듯 글쓰기를 시작한다.
첫 취재원을 만나러 전주로 향한 날은 겨울답지 않게 산뜻한 날이었다. 흡선으로 육체적인 질병을 치유 했다는 소식은 많이 들었지만 정신적인 질병을 치유 했다는 사례는 들어보지 못했기에 그녀에 대한 취재는 기대가 컸다. 전주시 외곽 고즈넉한 마을 남향받이에 어린이 교육시설로 지어진 깔끔한 저택이었다. 교육기관의 교사로 근무하고 있다는 그녀는 외소 해 보이는 체격에 선한 눈빛을 가진 여성이었다. 인사를 나누고 인터뷰를 시작했다. 함께 자리한 언니라는 분은 글을 통해 개인의 체면이나 사적인 영역이 허투루 들어나지 않도록 해달라며 신신당부를 한다. 그녀에게 질문을 시작했다.
“질병의 치료를 위해서는 보이는 증상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질병의 원인이 무엇이고 발병하게 된 과정이 더욱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선생님이 흡선 치유과정을 듣기 전에 발병과정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녹취에 대한 양해를 구하고 대화를 시작하면서 발병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요청했다. 그녀는 때로는 아픈 기억 때문인지 울컥 감정이 올라오는 모습도 보였지만 담담하고 조용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경북 예천이 고향인 그녀는 20대는 대구에 살다가 결혼을 하고 30대에는 경기도 파주에 살았다. 지금은 개발되어 도시화 되었지만 그녀가 살던 집은 전원주택으로 주변에 이웃이 많지 않던 곳이었다. 첫 아이를 낳고 5년 만에 둘째 아이를 낳았는데, 출산과 함께 문제가 생겼다. 임신한 상태에서 남편의 외도로 인한 부부간의 갈등이 심각해졌고, 출산으로 인한 산후 우울증까지 겹치면서 더욱 어려워졌다. 어느 날은 남편이 갓난아이를 감추는 어처구니없는 일까지 있었는데, 산모인 그녀가 느꼈을 불안과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된다. 아이를 낳아 본 사람이면 누구나 알겠지만 산후에 찾아오는 우울증은 대단히 위험하다. 단순히 산모 자신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갓난아기에게 해를 가하는 일도 비일비재한 것이 산후우울증이다. 그것만으로도 위험한데 남편과 불화까지 겹치면서 그녀의 삶은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잠을 못 이루는 불면의 날이 거듭되었고, 어느 날부터 머릿속에서 누군가 속삭이듯 말하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때 들린 말들이 어이없는 소리였지만 당시에는 그런 속삭임들이 유일한 의지처가 되었으며 진실처럼 믿게 되었을 것이다. 어쩌다 잠이 들면 끊임없이 악몽을 꾸었다. 3개월 정도 지났을 때는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상태가 되었고, 결국 시부모님이 있는 전주의 큰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치료를 받아 나아지기를 기대했지만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그녀가 기억하는 병원은 주사를 맞고 아무런 의지나 사고능력 없이 축 늘어져 있던 것뿐이었다.
“그러니까 그 때... 그러니까 제가 인터뷰를 하면서도 제 병명이 고스란히 나가는 것은 쪼금 부담스럽거든요. 제... 병명은 정신분열 지금의 조현병이죠. 말 그대로 정신분열과 같은 상태였어요. 아주 안 좋은 상태가 되어서 전주에 오게 되었어요. 전주에 오게 됐는데... 전주에서도 우울증 상태가 계속된 거죠. 그런 부분들이 계속 쌓이고 쌓이고 쌓이니까... 여기서도 자의로 어떻게 해본 것이 아니라 시부모님들이 병원에 데리고 간 거죠. 그 때 병원에서 느낀 감정이랄까... 뭐 그런 것은 내 의지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밖으로 나가거나 산책을 한다거나 누구를 만난다거나... 뭐 그런 일들을 전혀 할 수 없다는 절망감... 그런 감정이 느껴졌어요.”
그녀는 말하는 중간 중간 망설이는 것이 역력했다. 아련한 기억을 더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처음 입원한 병원에 그녀는 한 달 반 정도를 입원해 있었지만 상황은 전혀 호전되지 않았다. 반복적으로 안정제를 투여해 잠만 재우려 했다는 것이 그녀의 기억이다. 진정효과였는지 잠시 퇴원을 했으나 다시 상태가 악화되었고, 독방형태의 격리시설을 갖춘 개인 병원에 다시 입원하게 되었다.
“외부로터 완전 차단된 저의 자의로는 절대 밖에 나갈 수 없는 그런 병원으로 간 거였거든요. 갔는데... 도저히... 물론 온전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거기 도저히 못 있겠는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그 때까지 친정 쪽에서는 모르고 있었어요. 그런 상태가 된 줄 모르고 있다가 시부모님이 연락을 한 거죠. 이러이러해서 병원에다 입원시켰는데 어쩔 거냐? 데리고 갈 거냐? 그래가지고... 제가 우선 나가고 싶어 하니까. 오빠들이 와서 저를 데리고 간 거예요. 데리고 가면서도, 그 때 당시의 상태는 친정집 식구들도 다 포기한 상태였어요. 왜 이 상태까지 이렇게 두어 가지고 이제 사 우리에게 떠넘기나, 정신없는 와중에서도 그런 것은 기억이 나요. 큰 언니는 다시 돌려보내자. 감당이 안 되니까... 그 때 흡선하는 오빠가 내가 이런 저런 치유법을 알고 있으니까 얘를 내가 데리고 가서 내가 한 번 고쳐 보겠다. 했던 거죠.”
친정으로 돌아간 그녀는 오빠 덕분에 본격적인 흡선치유를 받기 시작했다. 부산의 이현기회장님을 찾아 상담도 받아보고 치유의 초점을 찾아가면서 동생을 구하기 위한 오빠의 치열한 노력이 이어졌다.
그녀의 말로 들어 본 치유과정은 정말 극적인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가 본격적인 흡선치유를 받았다고 기억하는 횟수는 단지 22회, 놀라울 정도 적은 횟수였다. 그녀가 받은 흡선치유 횟수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는 스스로 흡선을 해 본 사람이면 알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본인도 어느 날 갑자기 양쪽 눈의 초점이 안 맞아 속이 울렁거리고 어지러워 똑바로 걸어 갈 수조차 없고, 오른쪽 팔이 마비되어 들어 올릴 수조차 없는 지경이 되었었다. 안과의원이나 대학병원에서는 원인불명으로 혹여 뇌졸중의 전조증상 일 수 있으니 조심하며 지켜보자는 소견을 보였다. 안과전문 한방병원에서 4번 시신경 경색이라는 판정을 받았고 치료를 위해서는 6개월 동안 이틀에 한 번 통원치료를 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지리산에 사는 사람이 서울에 있는 병원에 6개월을 오르내리며 치료를 받는 다는 것은 치료하려다 중병 들게 생긴 상황이었다. 결국 혼자서 흡선으로 치료해 보기로 결심하고 1회 20분 정도씩 하루 4-5회, 3개월을 치료하고 정상이 되었다. 90일 동안 4회씩 했다 하더라도 360회 정도를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일상생활이나 정상적인 사고가 불가능하던 그녀는 단지 22회 치료로 끝냈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흡선치유법이 너무나 뛰어난 의술이기 때문일까? 그녀의 발병과정부터 세심하게 생각해 보면 해답이 있을까? 한 번 되짚어 봐야겠다.
가정불화가 시작되고 출산을 하면서 그녀는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했을 것이다. 만약, 그 때 가까이에 사는 누군가 있어 속내를 다 터놓고, 맘껏 수다를 떨거나 욕이라도 실컷 할 수 있었다면 증상은 그처럼 심각하게 진전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에 홀로 떨어졌다는 외로움, 남편에 대한 배신감, 출산으로 인한 산후증세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분노하고 슬퍼했으리라.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으니 홀로 곱씹으며 되새기고, 내 안의 또 다른 자아를 만들어 대화를 나누었을 것이다. 신체적으로는 잠을 못 자는 날이 거듭되면서 생체리듬이 깨어지고, 머릿속이 멍한 상태가 깊어갔을 것이다. 그런 날이 3개월 넘게 지속되면서 일상생활이나 정상적인 사고능력은 사라지고 내 안의 또 다른 자아가 속삭이는 소리는 마치 자신을 조종하는 마귀와 같았으리라. 그런 상태로 정신질환을 앓는 조현병환자로 판정받게 되고, 그에 따른 처방이 이어졌을 것이다. 치료를 위해서는 그녀 안에 자리 잡은 또 다른 자아를 끌어내고, 그것이 당신의 몸을 해치는 존재라는 것을 확인시키고, 그와 대화를 그만두게 하는 것이 필요했을 터인데, 초췌히 들어나 보이는 신체적 변화, 심각해 보이는 우울증 현상 등에 집착해서 자해방지 등의 미명으로 처방을 했으리라 짐작된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깊은 숙면, 내부의 자아까지도 깊이 잠들어버릴 만큼의 죽음 같은 숙면, 끊임없는 악몽으로부터 벗어나 꿈을 꾸지 않는 잠이 필요했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생체리듬까지 무너진 그녀에게 단순한 불면증 환자처럼 신경안정제를 투여하거나 하는 처방으로는 되돌릴 수 없었을 것이다. 잠을 못자면서 신체순환이 흐트러지고 심신은 지쳐갔을 것이다. 결국 그녀의 치료는 정신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기보다 생체리듬을 되살리고 순환을 이루면서 깊은 숙면을 잘 수 있게 하는 것이 요체였을 것이다. 흡선은 우리 몸의 가장 강력하고 큰 순환기관인 피부에 직접 시술하여 세포와 순환기관의 흐름을 되살리는 치유법이다. 그녀에게 흡선은 치유될 수 있는 단초를 열어 준 열쇠와 같은 것이었다. 흡선을 받던 중 어느 날부터 깊은 잠을 자게 되었고, 안색이 돌아오며 목소리까지 달라졌다 했다. 치유과정을 지켜보았던 가족들은 치유 이전에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녀의 것이 아이었다고 하고, 그녀는 자신 안에 들어 왔던 마귀였다고 표현 할 만큼 완전히 다른 사람의 목소리였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흡선치유를 진행하면서 깊은 잠을 자게 되고, 목소리가 정상으로 돌아오더라는 것이다.
그렇게 22회 차에 걸친 치유과정을 오빠에게 받고 난 그녀는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전주에 돌아오게 된다. 그녀에게 물었다.
“선생님의 증상은 흡선치유 이후로 완전히 나았습니까?”
“그걸로 완전히 나았다고 해야 할지... 정상적인 사고가 가능해졌고, 일상생활이 가능해졌으나 내면의 불안함은 여전했거든요.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혼자서 살아야 했으니까요.”
전주로 돌아온 그녀는 몸은 돌아온 듯싶었으나 불안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그녀의 표현에 따르면 ‘나를 지켜준 아버지’같은 존재인 목사 한 분을 만나게 된다. 지긋한 나이의 목사님은 그녀에게 예수님이 세상에 오신 의미를 알게 하고, 죄사함의 의미를 가르쳐 준다. 목사님을 만난 그녀는 한 없이 울었다고 했다. 그 동안 쌓인 울분, 서운함, 분노, 자신에 대한 가련함 등 그 모든 것을 다해 울음으로 토해냈을 것이다. 목사님과 그를 통해 만난 하나님의 존재는 그녀의 모든 것을 이해하고 들어주며, ‘네게는 죄가 없다.’라며 위로해주고 절대적인 자기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완전히 치유되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지금은 어떠십니까? 또 선생님에게 흡선은 어떤 의미입니까?”
“실상 흡선은 오빠에게 치료를 받고 나서는 잊어버리고 살고 있었어요. 그랬는데 여기 함께 일하는 언니하고 어떤 이야기를 하다가 흡선 이야기가 나왔어요. 내가 그런 것을 알고 있다. 그랬더니 언니가 ‘그럼 나한테 해봐라.’ 그렇게 된 거였어요. 그러던 와중에 아는 한 분이 유방암을 앓다가 수술을 해가지고 종양을 제거하고 생활 하다 7년 만엔가 재발 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뇌까지 전이가 된 상태였는데, 그러면 흡선으로 그 분을 어떻게 치유를 해줘볼까 싶었지요. 그러면서 이현기선생님께 연락을 하게 되었죠. 그분은 건강관리가 아니라 암을 치유하기 위해서... 암치유가 목적인 된 거죠. 그런데 저는 받기만 했지, 오빠에게 어깨너머로 본 것 밖에 없는 거잖아요. 내가 뭔가 다른 사람에게 해 줄 때는 내가 지식이 있어야 해 주겠구나 싶었고, 이 사람을 치유 해 줄려면 내가 알아야겠다. 그래서 여기 언니랑 같이, 세 사람이 부산에 갔어요. 그래서 다시 흡선과 연결이 된 거에요. 그분을 치유하는 과정에서 이현기선생님께 계속 여쭤보고 그랬어요. 그렇게 시작해서 그분을 제가 한 2년 정도 치유를 해 드렸어요. 계속 흡선을 해 드렸거든요. 상당히 좋았던 점은 암환자였는데도 불구하고 고통이 없었다는 것이에요. 돌아가실 때까지 한 번도 고통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아요. 계속 일상생활을 잘 하고, 처음에는 3개월 인가 시한부 판정을 받았었는데, 2년 여 동안 그냥 건강하게 일상생활하다 가셨어요.”
흡선치유를 일방적으로 받아보기만 한 사람에게서는 들을 수 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전부터 개인적으로 말기암환자에게 장기간 흡선을 했을 때 어떤 효과가 있을까 궁금했는데, 마침 그녀를 통해 사례를 들을 수 있었다. 흡선치유 경험을 취재하는 입장에서는 몹시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그녀와 나눈 이야기를 녹취한 그대로 옮겨 본다.
“암환자가 말기에는 통증이 엄청 심각한 것이 보통인데....?”
“그분은 온 몸에 암세포가 번졌는데도 한 번도 통증 없이 그냥 가셨어요. 저는 그분이 통증 없이 가셨단 것에 만족해요. 본인은 그냥 일상생활을 하다가 가셨어요.”
“최후 직전까지도 흡선을 해드렸다는 건가요?”
“예. 맞아요. 마지막에 며칠 동안만 그냥 호스피스병원에 가서 계시다가 가셨어요.”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굉장히 획기적인데요. 실은 호스피스병동에서 말기 항암환자들을 위한 처방의 핵심은 통증치료 아닙니까?”
“예. 일반인적으로 흡선 할 때 괴로움이랄까... 붙이는 것 자체의 통증이나 가려움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그 때는 내가 해주고 있지만, 나는 22회 차 할 동안에 수포 많이 생기고 그랬었지만, 고통은 몰랐었기 때문에 흡선 받을 때 감각이 가물가물한 상태였죠.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술을 겁 없이 했는지 모르겠는데... 그분은 어떻게 보면 생명이 달린 문제니까 참으셨는지 모르지만 내내 굉장히 시원해 하셨어요.”
“그분에게 얼마 동안 선생님이 흡선을 해준 건가요?”
“2년 동안 계속요. 이틀 한 번 씩, 어떨 때는 하루에 한 번 씩. 그냥 그분이 원하시는 대로 계속 해드렸죠.”
“그렇게 2년 동안을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계속 해 드렸다고요?”
“마지막에 호스피스병동에 며칠 있던 기간을 빼고는 거의 계속 해드렸던 것 같아요.”
“정말로 마지막 돌아가실 때까지 통증을 안 느끼고 가셨다는 건가요?”
“예. 통증 없이 그냥 가셨어요. 저는 그 부분이 만족스러워요. 그분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분이 돌아가신 것은 마음이 안 좋지만, 고통 없이 가셨다는 것은 굉장히 보람을 느껴요. 그분은 자기가 흡선으로 해야겠다는 마음을 굳히고 나서는 병원을 한 번도 안가셨거든요.”
말기암환자의 끝은 대부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으로 점철된다. 시도 때도 없이 찾아드는 고통에 시달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의 순간이 오면 병상 머리에 붙여 둔 통증표에 새겨진 숫자를 의료진이 짚어주면 눈빛으로나마 알리는 것이다. 대부분의 병원에서 말기에 다다른 암환자에게 해 줄 수 있는 치료는 통증완화를 위한 것이 주가 된다. 패치나 알약으로 처방되는데, 통증을 느끼지 않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보니 환자는 몽롱한 상태가 지속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부종과 통증이 거듭 쌓이는 상태에서 진통제 처방이 거듭되고, 환자는 코마상태와 비슷한 상황으로 빠져든다. 보호자가 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는 부종이 심해진 팔다리를 주물러주는 것, 대소변을 받아내는 것, 어쩌다 정신이 들었을 때 환자의 짜증을 받아주는 등이 전부인 것이다. 짧게는 몇 주에서 길게는 2~3년 동안 호스피스병동에서 말기환자로 연명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의 경험에 따르면 말기 판정을 받은 유방암환자에게 2년 동안 흡선치유를 해주었고, 마지막까지 통증을 느끼지 않고 편안한 임종을 맞이했다는 것이다. 만약 이것이 보편화 될 수 있다면 대단히 획기적인 통증치료 방법의 하나가 될 것이다.
“그분에게 속치법을 하셨나요? 아니면 저치법을 하셨나요?”
“속치법으로 했어요.”
“처음 시작할 때부터 계속 속치법으로?”
“예. 그분은 2년간 속치법만 하셨어요. 등을 하고 앞도 하고 다 하셨거든요. 앞뒤 다 했는데 치유의 70~80%는 등을 했다고 보는 것이 맞을 거예요. 앞 보다 등하기가 더 쉬우니까요. 제 아버지는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 때 병원에서 쓰는 것 보니까 마약성 진통제를 쓰더라고요. 의사와 대화 해보면 ‘그 사람이 나을 것이다’라는 기대가 아니라 고통을 없애주는 목적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분이 마지막까지 저의 흡선치유를 통해 통증 없이 가셨다는 것에 만족하는 거죠. 저의 흡선임상 중 암환자는 그분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어요. 그 후로는 암환자라거나, 또는 질의 치유를 목적으로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거든요. 제게 흡선은 그런 것이에요. 삶의 끝에서 만난 희망 같은 것이고, 질병으로 힘겨워 하는 다른 이에게 봉사 할 수 있는 그런 것이죠.”
그녀를 만나고 나서는 길에 따뜻한 햇살이 가득한 정원을 둘러보았다. 목사님이 가꾸었다는 정원이었다. 정갈하게 가꾸어진 정원을 보면서 누군가를 진정으로 포용하고 사랑을 가르친다는 것은 때로는 벼랑 끝에 선 사람을 돌려세우는 것과 같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문 앞에 선 그녀가 맑은 눈빛으로 인사하는 것을 뒤로하고 귀로에 올랐다. 전주에서 지리산으로 향하는 국도에는 채가시지 않은 겨울의 끝자락에 쏟아지는 투명한 햇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녀와의 만남은 한 사람의 영혼이 어떻게 망가지고, 정화 되는가 알 수 있게 되는 메시지 인 것 같았다. 나의 이번 글쓰기가 단순히 흡선치유 경험 취재기에 그치지만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한편으로 걱정이 되는 것은 정신적인 영역의 증상인 조현병을 치유 했다는 사례를 확인하기 위해 나선 첫 번째 취재원을 만난 감상 중 가장 큰 것은 ‘부담스럽다’였다. 어떻게 이야기를 정리하고 스토리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만족할 만큼의 글쓰기를 할 수 있을까 싶은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환자본인이 기억하는 치유과정은 시술자가 기억하는 것과는 분명히 다른 한계가 있다. 더구나 그녀처럼 치유를 경험해 본 후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는 기억의 오류, 기록의 유실 등의 문제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0년 가까이 흐른 세월은 많은 것을 흐릿하게 만들 수 있기 충분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을 채우기 위해서는 환자본인과 시술자를 모두 만나야 되겠구나 싶었다. 그녀를 시술했다는 오빠가 있는 포항에 다녀와야 할 이유가 생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