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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선희 여사, 창시자의 유품 본지에 기증
흡선치유법 창시자의 부인, 흡선 관련 유품 정리, 발행인에게 전달
 
이소현 기자 기사입력 2012/07/19 [17:41] 조회 4011
 창시자 유품을 본지에 기증하다.
『흡선치유닷컴』의 발행인 이현기는 7월 10일(화), 강봉천 창시자의 부인 어선희 여사를 뵙기 위해 서울 상도동 자택을 방문하였다.  방문을 맞이한 부인 어선희(79)여사는 형중 창시자께서 생전에 사용하시던 '흡선치유'에 관련된 유품들을 본지(本誌)에 기증하였다.  사진과 자료들로 구성된 여러 점의 유품들 중, 특히 선생께서 20여년 동안 사용해 온 공책들은 창시자의 친필기록이라는 점에서 특별한 가치를 지닌다.

▲  20 여년 동안의 형중선생 친필 기록 공책. 모서리가 닳아 있다  ©이소현 기자 

▲     400여명의 방문객 내용이 빼곡히 기록된 창시자 친필 공책         © 이소현 기자

▲  980 명의 방문객 명단이 빼곡히 기록된 창사자 친필 기록 공책      © 이소현 기자
 
생전에 형중선생을 찾아온 난치병 환우들의 이름과 연락처 그리고 방문일자와 병명까지 기록된 것으로서 방문자 일련번호까지도 꼼꼼히 기재되어 있다.  이 친필 기록은 후일 흡선치유법의 역사적 소장 가치가 있다 할 것이다.   
공책 귀퉁이가 닳도록, 그리고 한줄이라도 빈공간을 아끼려고 빼곡히 써내려간 형중선생의 검소한 품성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평생동안 '흡각'을 인생의 벗으로 살아.

▲  어선희 여사의 칠순 잔치에 함께하여 축하케익을 불어드리는  형중 강봉천생.                                            

▲ 어느 날엔가, 인천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모처럼의 나들이 이다.    ©이소현 기자
 
남편의 디스크 치료에 성공하다.
▲  어선희 여사(79). 상도동 자택  © 이소현 기자
 부인 어선희 여사는 형중선생이 디스크에 걸려 거동을 못하던 시절에 아내로서 몸소 치료자가 되어 선생을 낫게한 장본인이다. 
"디스크를 부항기로 어떻게 치료하셨어요? 힘드시지 않으셨어요? 하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도리가 없잖아요, 병원서도 치료가않된다 하고, 침이니 부항이니 심지어 수지침을 직접 배워 스스로 치료해도 않되고...일어나 앉지도 걷지도 못하는데 어떻해요?"

"처음에는 당신 배에 스스로 실험을 하시더니만 제게 배우게 하시더군요. 등에다 대고 할아버지가 시키는대로 부항기를 붙였는데, 글쎄, 누런물과 피고름이 부항컵에 꽉꽉차서 나오더군요. 징그럽기도 하고 냄새도 나고.. 에휴, 말로 다 못할 지경이었어요.  하루는 선지 피덩이가 컵 안쪽에 가득 붙어 나와서 신문지에 부어도 잘 떨어져 나오지 않는다고 말했더니만, 아, 글쎄 저더러 밥그릇을 가져와 담아두라는 것이었지요. 나중에 분석을 한다나, 어쩐다나..하지만 그런걸 내가 어떻게 해요, 그냥 신문지에 싸서 버려 버렸어요. 아무에게도 물어볼 곳도 없고 온 몸이 상처 투성인데, 상처에 상처가 물려도 또 당기라고 하시니 얼마나 아프셨겠어요..그 땐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죽고 살기로 해댔지요."
 
" 말 못할 정도로 징그러웠지요. 치료를 하지 않고 하루는 쉬는 날에는 내일 또 치료할 생각을 하면 징그러운 생각에 잠이 오지 않을 정도 였지요. 하지만 그땐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었어요. 몇년동안 몸져누워 일을 못하셨으니 다섯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다닐 때라, 돈이 너무 없어 힘든 시절이었지요."
 
"그렇게 하더니 점차로 낫는 것 같다고 말씀하시더니만 어느 날 일어서서 걷는 거였어요. 아, 죽으라는 법은 없구나! 이제 되었다! 정말 신기하더군요. 그 후로 할아버지(남편을 호칭하는 말)는 평생을 '흡각'(그당시는 흡각요법)을 하며 살아오신 분이세요. 조금이라도 몸이 불편한 곳이 있으면 무조건 흡각을 하고 살았지요. 소문이 점점나서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고, 예전에 하시던 설비업을 할 겨를이 없었지요"
 

1남 4녀, 매일 교대로 어머니 어선희 여사 돌봐.

▲ 막내딸 강용옥(41)씨와 함께 © 이소현 기자
이 날 막내딸 강용옥(41)도 함께 기자를 맞이해 주었다.  용옥씨는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 거의 매일 우리 딸들이 교대로 와서 어머니를 돌보고 있지요.”

"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는 잘 몰랐는데, 시간이 지나니 그 빈자리가 이렇게 큰 줄은 몰랐어요. 아버지가 너무 너무 보고 싶습니다." 하면서 눈시울을 적셨다.
 
형중선생은 비록 고인이 되셨어도 자녀들이 하나로 뭉쳐 어머님의 슬픔을 위로하고 떠받드는 효심이 장하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아무리 부모라도 존경받지 못하는 성품을 지녔다면 자녀들의 헌신이 저렇게 뒤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형중선생을 만나 본 사람들은 한결같이 ‘스스로를 낮추고 비우는 품성’을 지닌 분이라고 말한다. 물욕에 전혀 흔들리지 않고, 청빈을 자랑으로 삼으며, 성품이 곧고 바르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 그 였기에 선생의 빈자리를 자식들이 대신하며 어머니 어선희여사를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자녀들의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형중선생께서 인류를 구원할 천하대법(天下大法)을 창시하시고, 20년 이상 이끌어 오던 흡선치유법의 후계 구도를 발표하실 즈음이었다. 
제자들이 청하기를 " 이 일은 사모님께서 이어 받으셔야 합니다. 가업(家業)으로 승계하여 스승님의 대업을 받드셔야 합니다"  그러나 여사께서는 이러한 제자들의 제의를 극구 사양하고, 남은 생을 오로지 남편을 추모하며 자식들을 돌보는 일만으로 일관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  
 

형중선생께서 행하신 그대로, 모든 것을 비우고 내려 놓아라. 
▲  서울 국립 현충원 충혼당에 안장된 형중선생을 추모하며.  장녀 강호옥씨와 장남 강호경씨 와 함께 .  © 이소현 기자
▲ 형중선생께서는 심장병을 극복하신 후 당시 흡선치유학회장이었던 본지 발행인을 상도동 자택으로 불러 저녁식사를 함께하셨다. 후일 이것이 마지막 식사 장면이 되었다.     © 이소현 기자
기사입력: 2012/07/19 [17:41]  최종편집: ⓒ 흡선치유닷컴
 
징검다리 12/08/02 [00:47] 수정 삭제  
  직접 한 번도 뵙지는 못했지만 ,
평소에 검소하시고
오로지 인류를 구원할 天下大法을 창시하신분

이제는 일천께서 그 과업을 이어 선생님의 뜻 받들어
병든 자를 求하는 일에 혼신에 힘을 다하리라 믿어요.
사진으로 뵈오니....
형중선생님과 일천님이 많이 닮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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