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처음에는 흡선을 접했다는 기쁨에 겨워 곧바로 환자인 가족의 등에 흡선기를 붙이기 시작했습니다.
10회까지만 해도 일상의 작은 불편이나 피곤함이 사라지고 기분이 좋아진다며 엎드리자마자 힘껏 압력기를 잡아당겼습니다. 회수를 거듭할수록 이런 말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게 아프게 하는 거야” “끝나면 개운하고 시원하잖아. 좀 참아.” 이러면서 혼란기가 시작되었습니다. 흡입기를 든 사람은 엎드린 사람을 헤아리지 않았고, 그 헤아리지 않는 마음이 흡입기만 들면 교대로 되풀이되면서 짜증이 일어났습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갈등을 피하기 위해 자신의 아픔을 감추고 온건한 표정을 지으면서 선의의 말을 주고받으며 등을 쓸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흡선의 기쁨을 가로막는 부적절한 방법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그것은 아픔에 대한 개인차를 가볍게 여긴 것이며, 개인차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음이며, 개인차를 무시하는 것이었습니다. 강봉천 선생의 '백성의 의술이니 백성의 품으로'라는 말의 의미는 흡선을 단순히 누구나 아무렇게나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만의 흡선시술 방법을 스스로 찾으라는 뜻이 더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환자에게 맞추라, 그래서 환자 자신의 흡선이 되게 하라"라는 뜻입니다. 엎드린 사람을 고려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흡입기를 들기보다는 서로가 보살피고 격려하고 도움을 주는 호혜적 관계를 되살린다는 측면에서 흡선이 자연적이며 생태적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걸 지향하는 이유는 흡선을 하면서 평화의 관계망이 자연스럽게 조성되어 삶이 더욱 풍성해지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대도 때로는 흡선의 기쁨을 가로막는 ‘강요하는 듯한 대화’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는 면을 들여다보기도 했습니다.
엎드린 사람이 아프다고 하면 그 말을 무시할 것이 아니라, 그 느낌을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마치 흡선의 모든 것을 아는 양했던 행동을 멈추어 보십시오. 그래서 흡선은 기쁘기도 하지만 또한 현실적이기도 합니다. 섭섭한 일과 기쁜 일이 적당한 비율로 일어나는 순간순간들을 받아들여보면 시술자와 환자간에 어떤 특별한 연대의식 같은 게 느껴집니다.
만약에 강봉천 할아버지가 추간판 탈출증(디스크)이라는 진단을 받고 노인이라 수술조차 할 수 없어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은 다음, 그것을 온순하게 받아들이고 복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명과 자유의 민중의술이라 일컬어지는 흡선치유법은 태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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